원화 약세 기조가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원화 약세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 환율이 오르면 불안 심리가 싹튼다. 또한 원화 약세는 수출 기업에는 좋지만 이와 무관한 일반 사람들은 자신의 대외 구매력 하락으로 실질 소득이 줄어든다. 하지만 현 상황에서 원화 약세 기조는 경제 난국을 탈출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으므로 숙고해 봐야 할 정책 변수다. 왜 필요하며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지 알아본다.

 

현재 우리나라 경제는 여러 부정적 요인에 노출되어 있다. 세계 경제의 초과 공급 문제가 해소되지 않은데다 미ㆍ중 무역전쟁으로 인한 글로벌 가치 사슬의 변화로 상품 수출 시장 전망이 밝지 않다. 고령화와 가계 부채 부담으로 민간 내수 활성화도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재정 지출만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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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업 수출이 경제 성장의 동력인 선진국들은 환율 정책을 사용한다. 일본은 아베 정부가 들어선 이후 엔화 약세 정책을 쓰면서 ‘근린 궁핍화 정책’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2011년 70엔대까지 떨어졌던 엔ㆍ달러 환율은 2015년 120엔을 넘었다가 지금은 108엔대에 머무르고 있다. 독일은 경상수지 흑자가 GDP 대비 8%나 되지만 유로화는 별다른 변화가 없어 막대한 경상수지 흑자가 지속되고 있다. 유로화는 독일의 거시 변수를 반영하는 게 아니라 유로통화 가입국 경제를 가중 평균하여 반영하기 때문이다.

 

경상수지 흑자국은 자본 수출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 중국은 경상수지 흑자로 벌어들인 달러로 미국 국채를 샀다. 독일은 최근 5년 동안 직접투자와 간접투자를 통해 해외로 나간 돈이 1,500조원에 이른다. 이 값이 일본은 1,250조원이며 우리나라는 400조원이다. 오일ㆍ가스 수출로 GDP 대비 경상수지 흑자가 8%에 이르는 노르웨이는 국부펀드 규모가 1,000조원으로 이 중 해외주식 비중이 70%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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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원화 약세 기조는 민간의 자본 수출을 통해서 가능하다. 우리나라는 올해 9월까지 경상수지 흑자 누적액이 410억달러(2019년 같은 기간 실적은 570억 달러)에 이르는 등 흑자가 지속되고 있고 민간의 자산도 축적되고 있으므로 자본 수출 여건은 좋다. 벌어들인 달러를 내보내고 축적된 원화 자산을 외화 자산으로 바꾸면 된다. 단, 환헤지를 가급적 하지 말아야 한다. 2000년 중반에 우리는 해외로 자산을 내보냈지만 환헤지를 하는 바람에 글로벌 금융위기 때 곤욕을 치른 경험이 있다. 국민연금이 해외자산 비중을 확대하면서 환헤지를 하지 않는 것은 올바른 방향이다.

 

원화 약세는 그나마 제조업 기반이 있을 때 효과적이므로 선제적인 게 좋다. 남미에서 보듯이 제조업 기반이 약하면 통화 약세가 경제 회복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때 원화 약세가 우리나라 제조업을 크게 성장시킨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향후 우리나라 제조업 경쟁력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제조업 경쟁력이 약해진 뒤에 원화 약세가 되어 봐야 긍정적 효과가 크지 않고 대외 변수만 불안정해질 따름이다. 지금 시점에서 선제적으로 원화 약세 기조가 필요하다. 최근의 원화 약세는 그런 측면에서 긍정적이지만 기조를 계속 이어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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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원화 약세는 수출 기업에 이익이 되는 반면 이와 직접적 관련이 없는 소비자들은 대외 구매력이 하락하므로, 수출 증가 이득을 환율 상승으로 상대적 손해를 보는 부문에 잘 퍼지게 하는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물체가 지구를 벗어나려면 지구의 중력을 이겨야 한다. 지구 크기 중력을 이기려면 초속 11km 속도(시속 약 4만km) 이상의 추진력이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만만치 않은 구조적 저성장에 접어들었다. 지금과 같은 재정지출 확대만으로는 저성장을 탈출하기 어려우며 무엇보다 제조업 성장잠재력을 유지하지 못한다. 자본 수출을 통한 원화 약세 기조로 강한 추진력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출처 : 한국일보/미래에셋은퇴연구소
기고 : 김경록 미래에셋은퇴연구소장